밀양 ㅣ 이창동



cello  - 이화윤

piano, programmed by  김태성

음원 출처 http://blog.naver.com/logic22?Redirect=Log&logNo=100036795742
상세한 줄거리 포함.



작년 이맘때쯤 외삼촌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이상하게도 그 장례식장에서 나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존재의 소멸이 슬퍼서라기보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자기 연민 때문에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밀양>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그날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자기 연민' 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종교와 신의 구원에 대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신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신'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애는 남편을 사고로 잃고 아이와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살러 내려온다. 오는 길에 차가 멈춰서 카센터 사장인 종찬의 도움을 받는다.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의 뜻에 대해 묻고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 비밀의 볕 secret sunshine. 신애는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애쓰지만 어느날 하나뿐인 아들 '준'이 유괴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거의 생략된 채 '준'은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제부터다. 신애는 어떻게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날 것인가. 신은 그녀를 구원해줄 것인가.

나는 이 영화 '신애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애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애는 구원받을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 절망적 상황으로 신애를 이끄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애는 그 선택으로 평화와 안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과 좌절속으로 빠져든다. 왜냐하면 신애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부자연스럽다. 죽은 남편이 자신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음에도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 살고,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재산이 없는데도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살겠다고 떠벌린다. 그리고 아이를 유괴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없음에도 용서해주려고 한다. (용서하는 것과 용서'해주는' 것의 차이 )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애가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선택들을 하는 이유는 신애가 그 선택을 하는 기저에 있다.

신애는 밀양에서 자신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종찬에게 "이사장님같은 분을 '속물'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신애야말로 '속물'이다. 신애가 하는 선택들은 끊임없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극이 진행되면서 내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신애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절망속에서 종교를 통한 안식과 구원을 구한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애는 진정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다. 신애는 끊임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도망치면서 스스로를 속인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하다고.

신애가 교도소 면회 이후 더 큰 충격으로 좌절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용서를 마음으로 하면 됐지 굳이 면회까지 가서 용서를 해야 하냐며 만류하지만 신애는 직접 얼굴을 보고 용서하겠다고 한다.

신애는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보고 싶어한 걸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한 걸까. 그러나 이 선택으로 인해 신애의 삶은 다시 한번 파괴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는 신애에게 범인은 갇혀 있으면서 자신 역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한다. 이 말은 신애를 더한 절망속으로 빠뜨린다.

교도소 면회 직후 범인에게 보여주려고 꺾어 온 꽃을 버리고 쓰러지는 신애. 신애는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린걸까? 그러나 인간이 신을 버릴 수 있는걸까? 그 반대는?
주변에서는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신애를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신애는

"내가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잖아요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신애가 종찬에게 '속물'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후 신애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속물'이며 '자기기만'에 빠진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교회의 장로를 유혹하려 한다. 누워있는 신애를 거꾸로 잡는 카메라. 신애는 마치 하나님께 저항이라도 하듯 보란듯이 있다. 신애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 창문에 돌을 던지고, 잠을 자다가 오지도 않은 전화를 붙들고 유괴범과의 통화를 재연한다. 집안의 모든 불을 켜놓고 자살하는 순간 하늘을 보듯 형광 불빛을 향해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구원을 요청하는 손길이다. 이것이 신애의 선택이다.

종찬은 신애가 더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음에도 교회에 나간다. 그러면서 교회에 안 나가면 서운하고 나가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우리 삶에 신, 종교라는 것이 이 정도의 의미여도 괜찮지 않을까. 신애가 옷가게에 모여있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설득할 때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종찬의 대답과 같은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좀더 높고 고상한 차원이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이유와 의미로 종교를 가진다. 신애가 밀양에 처음 와서 약사에게 교회다닐 것을 권유받았을 때 신애가 했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약사가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며 저 빛 가운데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 하자, 신애는 햇빛이 보이는 곳으로 손을 뻗치며 어디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냐며 묻는다. 약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느냐고 묻자, 신애는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들을 잃고 절망 속에서 교회를 찾고 그 속에서 구원을 바란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가 하늘에서 시작하지만 땅으로 끝나는 이유가 "우리 인간의 의미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의미를 좇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신애는 점점 더한 고통과 절망 속으로 빠지는가에 대해, 왜 신은 신애를 구원하지 않는가에 대해 신은 신애를 구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답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신애는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선택을 해야 하며 자기 연민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신애가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오는 장면은 신애가 자기 기만과 자기 연민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 것이 아닐런지.

나는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인간은 신을 부정할 수도 그에 저항할 수도 없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한 고통속에 빠져든다. 인간이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때, 진정으로 구원의 손길을 요청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신의 구원이 곁에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참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이 영화에서 최고로 꼽는 장면은 교소도 면회 장면.
이 순간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경이롭다.

그러니까 연기를 잘한다는 게 단순히 발음과 발성이 좋고 표정이 그럴 듯해보이는 그런 게 아니다. 본래 아름다운 얼굴이나 신비할 정도로 뒤틀리고 일그러진 그 얼굴에 있다. (단순이 일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얼굴의 온갖 뼈와 근육이 온전히 신애자신이었던 것처럼)



칸 영화제에서 어떤 기자가 전도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런 영화를 찍으면서 어떻게 결혼까지 했느냐고.
나는 전도연이야말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연기할 때는 인간 전도연을 완전히 비우면서
일상에서는 배우 전도연을 완전히 비우는......
실제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지만, 이렇게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분명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종찬 역의 송강호는 정말 '괴물'같은 배우다.
이 무겁고 어두운 영화에서 그런 웃음을 유발해낼 수 있다니.
그러나 그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을 튀어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속에 스며들어 균형을 잡는.
처음에 종찬을 보고 주변에 있다면 참 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치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오지랖넓은, 그러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아저씨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든 생각은 종찬의 무게만큼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신애가 종찬을 그렇게 봤듯이,
내가 신애를 그렇게 보는 것은
내 자신이 속물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


그나저나 이번에 '밀양'을 보면서 극장과 영화보기에 대해 생각했는데
나에게 영화는 오락이 아니며
즐거움보다 상처를 치유하는 양식이며
극장은 성지이고 병원이고
영화보는 행위는 예배를 보고 절을 하고 진찰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함께 영화 보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었으면 한다.
2시간 동안 떠들려거든 극장에 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by 붉은손 | 2008/01/10 17:09 | 몽당연필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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